안녕하세요. 오늘은 패션의 역사에서 소개하고 싶은 인물은 바로 크라스토발 발렌시아가입니다.
'파리 모드계의 교황이라고 별칭으로 기억되는 발렌시아가. 그 별칭은 우아하고 절제된 건축적인 디자인과 완벽한 기술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한 치의 어긋남도 허용치 않는 발렌시아가의 천재적인 재단 기술은 그 어떤 디자이너도 따라 하기 힘들 만큼 독보적이었다는 발렌시아가를 오늘 같이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그의 명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쿠튀르에는 설계에 있어서 건축가여야 하고 형태에 있어서는 조각가여야 하며 색채에서는 화가, 조화에서는 음악가 그리고 절제에 있어서는 철학자여야 한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유년시절
1895년 1월 21일 날에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탄생과 유년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유년시절은 작은 어촌에서 평화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어부였던 아버지는 늘 바다로 나갈 때에 발렌시아가는 항상 마중을 나가며 배웅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바느질로 생계를 함께 이어오게 있었습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였습니다.
어머니의 바느질을 보고 있을 때 어머니가 힘들까 봐 자기가 바느질을 해볼 수 있냐며 어머니대신 바느질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도우던 중 이외의 모습이 이었는데 바로 그의 바느질 솜씨가 무척이나 꼼꼼하고 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매일같이 어머니를 도우며 시간을 보내던 중 아침 일찍 아버지를 배웅하고 바닷가를 걷던 발렌시아가는 열세 살 당시에 자신의 인생을 바꿀만한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됩니다.
바닷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있어서 같이 놀게 되었는데 이 아이들이 자신들의 별장으로 초대를 하여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들의 할머니를 보게 된 발렌시아가는 할머니의 드레스를 보고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께 드레스를 칭찬하며 자신이 그 옷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뚱맞은 소리를 하여 처음에는 할머니도 장난으로 받았으나 발렌시아가의 진지한 모습에 옷을 빌려주게 됩니다. 그리고 며칠 후 발렌시아가의 손에는 옷이 두 벌이 있는데 바로 그 할머니가 입던 똑같은 옷이었습니다. 발렌시아가는 할머니께 옷을 가져다 드리며 자신이 만든 것을 보여주었는데 할머님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사실 별 기대감 없이 빌려준 옷은 당시 프랑스의 장인이 한 땀 한 땀 꿰맨 오트 쿠튀르 옷이었던 겁니다.
심지어 발렌시아가는 똑같은 것을 넘어 더 촘촘히 바느질을 깔끔하게 한 모습에 카사 토레스 후작부인은 곧바로 발렌시아가에게 제안으로 산 세바스찬에 있는 한 부티크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덕분에 발렌시아가는 몇 년간 어촌에서 배울 수 없었던 다양한 테일러일 기술을 익히며 디자이너로의 꿈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그가 17세가 되던 날이었습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시작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시작은 사실 17세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 한참 패션에 푹 빠져있던 발렌시아가는 프랑스 파리가 패션의 중심임을 알고 언젠가는 갈 것이라는 마음으로 이때부터 불어를 따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19년 발렌시아가는 산 세바스찬에 자신의 부티크를 오픈했고 이어 1933년과 1935년에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도 숍을 차릴 정도로 크게 성장을 해 나갑니다. 당시에 가게는 어머니의 성을 따서 짓게 됩니다.
부티크를 운영하며 옷을 만드는 돈 안 그의 재단과 구성 테크닉은 점점 신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는데 특히 그는 강박적이라고 할 만큼 옷의 완성도에 집착하는 완벽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뛰어난 테크닉과 완벽주의 덕분에 발렌시아가는 당연하다는 듯 스페인에서 최고의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하지만 1937년에 스페인이 내란으로 주요 고객층이 방문을 하지 않자 점점 운영이 힘들어져 결국에는 문을 닫게 됩니다. 하지만 발렌시아가는 낙담을 하는 게 아닌 자신의 실력을 패션의 성지인 파리에서도 인정받기를 원하기에 곧바로 파리로 출발을 하고 이렇게 스페인의 디자이너 발렌시아가가 드디어 프랑스 파리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에 파리는 열정으로 가득 찬 디자이너들을 비롯해 멋쟁이 파리지앵들로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또 프랑스 정부는 의류 수출로 들어오는 수입이 막대했기에 오트 쿠튀르를 지속적으로 지원하였고 자연스레 파리는 세계 패션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런 파리에 1937년 프랑스 출신이 아닌 외국인 디자이너 발렌시아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첫 부티크를 오픈을 합니다.
당시에 파리는 발렌시아가가 스페인에서는 이름이 통했지만 이곳은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기에 찾아가지 않다가 발렌시아가가 첫 파리 컬렉션을 선보이던 날에 이 모든 게 바뀌게 됩니다. 이때 탄생한 별칭이 바로 파리 모드계의 교황이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순간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에 그가 내건 컬렉션은 스페인의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었고 파리의 사람들은 이 작품에 감탄을 하게 되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으며 심지어 그에 대한 기사도 여기저기 쓰게 되며 그는 쇼를 치르자마자 단숨에 파리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정신력이 대단한 부분이 있으니 당시에 2차 세계대전이라 많은 디자이너들은 원자재 부족으로 인하여 문들 닫는 곳이 정말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때에도 발렌시아가는 오히려 부족한 양의 원단을 가지고도 볼륨감 있는 옷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연구를 하였고 마침내 많은 천을 겹치치 않고도 풍성한 실루엣을 만드는 테크닉까지 터득하게 됩니다. 다른 디자이너들에게는 암울했던 전쟁의 시기가 발렌시아가에게는 테크닉을 더욱 향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또한 발렌시아가는 다른 많은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들과 달리 스스로 직접 드레이핑과 재단을 하며, 손으로 완벽하게 바느질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쿠튀리에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에는 디자인을 스케치하기만 했지 옷을 직접 만들지 않는 디자이너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재단에 대한 지식이 없는 쿠튀리에들은 신선하고 획기적인 실루엣을 창조할 수 없었지만 발렌시아가의 테크닉과 지식은 다른 쿠튀리에들이 시도하지 못하는 다양한 볼륨감을 가능하게 한 것이죠. 한편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당시 파리는 크리스천 디올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디올은 뉴룩을 통해 모래시계와 같은 굴곡 있는 라인을 유행시키고 있었는데 발렌시아가는 이 유행을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본인만의 스타일로 옷을 만들어서 내걸게 되는데 1947년 허리 부분이 불룩 나온 와인통 실루엣을 발표합니다. 당시에 유행과는 반대인 셈이지요. 그에 디자인은 항상 10년을 앞선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1940년대에 디올이 발표한 뉴룩을 발렌시아가는 1930년대에 이미 만들었으며 뉴룩이 한창 인기를 얻을 때에도 10년 뒤에 유행할 옷들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를 시대에 앞선다는 뜻으로 예언의 불꽃이라며 극찬을 하였습니다. 한편 발렌시아가는 향수도 론칭을 하는데 당시에 향수 업계를 주도한 기업이 샤넬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 샤넬을 위협한 것이 발렌시아의 르 딕스 향수라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지요. 발렌시아가의 이런 천재적인 모습에 많은 디자이너들이 질투와 존경을 드러내었는데 그중 샤넬은 질투와 인정을 보였다고 합니다. 신문사의 인터뷰에서 발렌시아가만이 자신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한다며 비판으로는 그에 만드는 스타일이 여성의 몸을 돋보이는 게 아닌 여성들의 가리고 싶은 주름진 목이나 블라우스를 코트 안에 넣게 하는 스타일들을 보며 그가 게이가 아니냐며 비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발렌시아가의 기행과 은퇴
발렌시아가는 유독 독특한 기행과 갑작스러운 은퇴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는 항상 비밀스럽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은둔형이었습니다. 자신의 컬렉션이 있는 날이면 혼자 백 스테이지의 커튼에서 자신의 쇼를 훔쳐보는가 하면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다르게 기자들을 유독 싫어하였으며 고객들과 바이어들에게 옷이 배달되기 전까지는 절대 언론에 자신의 새 디자인을 공개하지 않았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당시 디올이 발렌시아가의 실루엣을 따라 한다는 의심 때문이라고 도 합니다.
이렇게 잘 나가던 발렌시아가는 어느 날 1968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명확한 이유는 없습니다만 추측으로는 시대가 변하면서 오트 쿠튀르는 점점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간편하게 만들어지는 프레타 포르테가 패션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쿠튀리에 중에 쿠튀리에 하는 찬사를 받던 모드계의 교황은 30년의 업적을 뒤로하고 자취를 감추다가 1972년 3월 24일 그는 스페인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은퇴 후 그의 마지막 행보는 코코 샤넬의 장례식장 참여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스승이자 존경받는 인물로 꼽힙니다. 디올은 그를 모든 디자이너들의 마스터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