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패션의 역사입니다. 오늘은 위베르 드 지방시에 대해서 같이 알아보겠습니다.
만인의 연인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었던 검은색 드레스 기억하시는 분 있으실까요?
고급스러우면서 심플한 디자인과 실루엣을 특징으로 하는 이 드레스는 바로 지방시의 작품입니다.
이런 미적 감각이 있는 인물을 함께 알아보도록 하며 지방시의 명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몸을 드레스의 모양에 맞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드레스가 여성의 몸에 맞춰져야 한다.
지방시의 시작
지방시의 패션의 시작은 남달랐습니다. 바로 열 살 때에 이미 그는 패션에 세계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죠.
그는 파리 박람회에서 패션 코너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당시 잘 나가는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보고 한눈에 매료되어 버리고 그날 이후 보그 잡지에 나오는 의상을 따라 그리는 게 취미이자 일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 발렌시아가의 의상에 빠져 있었습니다.(나중에는 발렌시아가의 제자가 되며 많은 애정을 받습니다.) 1944년 17세가 되던 해에 그는 본격적으로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고 프랑스 일류 예술학교에서 공부하며 실력을 쌓고 있는 어느 날 발렌시아가의 작품을 공부하다가 꼭 그를 만나고 싶었기에 무작정 그의 작업실을 찾아가게 됩니다. 찾아갈 때는 자기 스스로도 포트폴리오도 갖추고 방문을 하는데 발렌시아가는 그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잘하였으나 당장의 실무 경험도 없다며 실무 경험을 쌓고 와야지 같이 일할 수 있다며 처음에는 돌려보냈습니다. 이후 지방시는 여러 부티크에서 일을 하며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갑니다. 그리고 1951년 파리에 알프레드 뒤치니 8번가에 자신의 첫 부티크를 오픈하게 됩니다. 곧 지방시는 자신의 첫 번째 컬렉션을 준비하기 시작하는데 신인 디자이너인지라 고급 원단을 구입하기에는 돈이 너무 없던 지방시는 차선책으로 선택한 원단이 남성복 와이셔츠로 쓰이던 저렴한 흰색 면이었습니다.
당시 파리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원단이 주를 이루는 오트 쿠튀르에서 아무 무늬 없는 흰색 면을 가지고 컬렉션을 준비한다는 건 큰 모험이었죠. 그래도 열심히 준비하여 그가 선보인 첫 번째 컬렉션의 이름은 세페레이츠였습니다. 의미 그대로 스커트와 블라우스처럼 하나의 드레스가 아닌 단품을 디자인하여 쇼에 올린 것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것 또한 모험이라 할 수 있는데 오트 쿠튀르에서는 원피스나 드레스, 혹은 한 벌로 이루어진 의상을 선보이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쇼에서 지방시는 베스트셀러 아이템을 탄생시켰습니다. 바로 베티나 블라우스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유명 모델이었던 베티나 그라지아니가 이 블라우스를 입고 쇼에 서게 되면서 붙은 이름입니다. 이 블라우스는 경제적인 하얀 면만 사용하였는데도 우아함을 풍겼습니다. 풍성한 러블이 달린 소매와 깃이 올라온 네크라인 디자인이 만나 투명하고 신선한 느낌의 고급 블라우스가 탄생한 것이죠. 이는 곧 많은 지지를 받으며 당시의 패션 클래식이 되었습니다. 첫 컬렉션의 큰 성공으로 그는 각종 언론에 노출되었고 금세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도 연령과 체형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잘 어울렸기에 여성들은 지방시의 옷을 한 번 구입하면 평생 고객이 되었지요.
지방시의 패션 철학
지방시에게는 그만의 패션 철학이 있었는데 위에 언급한 지방시의 명언이 곧 그의 패션 철학이었죠. 하지만 이 철학의 영향을 누구에게 받았느냐는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드계의 교황인 발렌시아가입니다. 지방시의 발렌시아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대단했지요. 그를 더욱 가까이하기 위해 1961년에 자신의 부티크를 조르주 5번가로 옮겼는데 바로 발렌시아가 부티크 맞은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발렌시아가의 출근을 기다렸다가 자연스럽게 다가가며 찬 분을 쌓았고 처음에는 스승과 제자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예술적 감각과 취향이 비슷해 곧 서로 친구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발렌시아가는 자신의 스케치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지만 지방시에게는 다 공유하며 그를 응원해 주었고 심지어는 자신의 피팅과정과 작업실마저 빌려주며 그에게 많은 것을 퍼주게 됩니다. 또한 발렌시아가가 은퇴할 적에는 자신의 VIP 고객들마저 지방시에게 넘겨줄 정도로 많은 사랑을 주었습니다.
이는 당시에 오트 쿠튀르계에서는 정말 드문 일이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서로 더 좋은 작품을 위해서 자신의 아이디어는 당연히 숨기며 다녔으니까요. 특히나 발렌시아가는 은둔형이었기에 지방시에게 쏟는 애정은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방시도 당연하듯 발렌시아가의 걷는 길을 따라 걸으며 언제나 그의 조언과 결정을 따랐으며 배워갔습니다.
또한 지방시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오드리 헵번입니다. 당시 유명 여배우였던 캐서리 헵번이 자신에 전화를 걸어서 온다는 소식에 기뻐했으나 지방시에게 온 인물은 오드리 헵번이었습니다. 지방시는 실망하며 빨리 보내려고 하지만 그녀의 열정과 매력을 알게 되어 그녀가 출현하는 영화 <사브리나>의 의상을 제작하여 줍니다. 이 영화는 엄청난 흥행을 하며 의상 또한 사랑을 받아 오스카 상 의상 디자인 부분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 둘은 영화 역사상 가장 놀라운 스타와 디자이너 콤비로 항상 같이 활동하며 늘 오드리 헵번을 위해 의상을 제작을 해주게 됩니다. 오드리 헵번 또한 매일같이 그의 샵에 방문하기도 하며 지방시가 쇼를 개최하면 늘 앞자리에 앉아서 응원해 주곤 했습니다. 또한 지방시는 오드리를 위해 행수 "랭테르디"를 만들었는데 불어로 금지라는 뜻의 이 향수는 오드리 헵번 외에는 그 누구도 쓸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렇게 그녀와 지방시의 관계는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무려 40년간이나 이어져 옵니다.
또한 오드리 헵번 외에도 지방시의 옷을 사랑했던 인물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키 케네디도 있습니다. 그런데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비극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방시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 주는데 재키 케네디가 장례식장에 입을 옷을 지방시에게 주문하였고 케네디 가문 전체가 지방시의 옷을 입고 장례식장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장면이 각종 매체를 타면서 지방시의 옷이 상류층이 즐겨 입는 옷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지방시의 인기는 더욱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지요. 또한 1977년에는 자동차 링컨 마크 5를 디자인하기도 했는데 출시되자마자 품절이 될 정도로 지방시가 손대는 것마다 성공을 하지요. 그는 발렌시아가 이후 재단을 가장 완벽하게 하는 디자이너로 칭송을 받으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리다가 1992년 40주년을 맞으며 은퇴를 염두하다가 1995년 7월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패션계에서 은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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