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패션의 역사입니다. 오늘은 이브 생 로랑에 대해 분량 관계로 2번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거두 절미 하고 저번에 이어서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브 생 로랑의 명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만약 제 인생에서 제가 만든 옷들 중 딱 하나의 디자인만 골라야 한다면 전 아무 고민도 없이 르 스모킹을 고를 것입니다.
이브 생 로랑의 혁명
이브 생 로랑의 패션계의 혁명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번에는 이브 생 로랑이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고 끝을 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격을 가진 그였지만 그의 첫 컬렉션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지요. 그 이유는 그가 공개한 의상이 카방이라고 불리는 코트였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선원들이 즐겨 입는 투터운 코트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굵직한 직선 실루엣과 커다란 더블 단추가 특징입니다. 흰색 와이드 팬츠와 매치하여 선보인 이 코트는 이브 생 로랑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은 매 컬렉션마다 패션사에 길이 남을 의상들을 많이 탄생시킨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그는 예술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옷을 많이 선보였는데 그중 1965년 파리 컬렉션에서 발표한 몬드리안 드레스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1960년대에 여성들에게 있어서 슈트란 재킷과 스커트로 이루어진 한 벌의 정장이었습니다. 바지 정장이란 것은 여성의 의상이 될 수 없었고, 특히 세련된 멋이 나는 턱시도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이브 생 로랑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각은 턱시도를 입은 여성도 스타일리시하고 섹시한 매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다짐을 하며 준비한 게 바로 그의 시그니처가 되는 1966년, 오늘날까지도 이브 생 로랑을 대표하는 아이콘인 르 스모킹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는 남성의 턱시도를 변형시켜 여성의 체형에 감각적으로 접목시킨 여성용 바지 슈트로 검은색 재킷과 바지, 흰색 블라우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패션계의 거대한 혁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금껏 그 어떤 디자이너도 오직 여성만을 위한 바지 슈트를 세상에 보인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너무나 엄청난 시도였던 만큼 많은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르 스모킹이 출시되자마자 이브 생 로랑의 런던 부티크의 매니저였던 클래어 랜들섬은 곧 이것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어느 날 리츠호텔을 방문하였는데 입구에서 막는 것이었습니다. 사유가 복장 불량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용 바지 정장은 일반인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이상이었고 사람 들고 거부반응이 심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은 스커트만을 여성의 의복으로 여기던 고정관념을 깨트리며 여성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또 남성들만이 입는 바지 정장을 여성들이 매일같이 일상복으로 입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도 진보된 남녀평등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충격적이던 이 의상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여성들도 바지 정장을 입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여성들의 세련된 바지 슈트를 입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다 이브 생 로랑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갈색 머리, 마른 체구에 안경 낀 수줍은 얼굴의 이 청년인 이브 생 로랑, 내성적인 성격으로 어릴 적부터 놀림을 받던 그는 패션이란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한 시도로 결국 패션사에 크나큰 돌풍을 일으켜 버렸으니 말입니다,
패션사에 변화
한편 1960년대 프랑스의 파리의 패션사도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밀라노와 뉴욕의 기성복 라인, 프레타 포르테가 파리의 고급 맞춤복 라인, 오트 쿠튀르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오트 쿠튀르의 교황 발렌시아가는 이러한 세태를 지탄하며 은퇴를 선언하기도 합니다. 발렌시아가가 보기에는 전혀 예술적이지 않았던 것이죠. 하지만 이브 생 로랑은 이 대세를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곧 1966년 이브 생 로랑의 프레타 포르테라인인 "생 로랑 리브 고슈"가 론칭됩니다. 리브고슈는 이후 이브 생 로랑의 오트 쿠튀르 라인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정도로 성장하였고 오늘날 선보이고 있는 이브 생 로랑 역시 바로 이 리브 고슈 라인입니다. 르 스모킹 이후로도 그의 컬렉션은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특히 그는 다양한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하고 했는데 1967년에는 아프리카 문화를 바탕으로 한 아프리칸, 에스닉 룩을 선보입니다. 이듬해인 1968년에는 사하린느라는 테마로 최초의 사파리 재킷을 선보였는데 이 재킷은 당시 허벅지까지 높이 올라오는 부츠와 코디되면서 여성의 섹시미를 한껏 발산시켰다는 평을 받습니다. 또한 지방시에게는 오드리 헵번이 있는 것처럼 이브 생 로랑에게는 프랑스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가 있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은 그녀의 영화의 디자인을 하였는데 둘은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서로 지지하며 서로의 뮤즈가 되어갔습니다.
이브 생 로랑의 변천사
이브 생 로랑이 기업으로도 성장하면서 다양한 변천사를 겪게 됩니다. 먼저 1970년대에는 이브 생 로랑에게 있어서 스캔들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스캔들은 바로 그의 누드 사진이었습니다. 다른 프랑스 디자이너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1971년 남성용 향수인 YSL을 론칭하는데 이때 향수 광고 포스터에 자신이 직접 누드모델로 등장한 것입니다. 또한 1977년에 출시한 여성용 향수인 오퓸 역시 스캔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는 또 19세기 중국에서 일어난 아편 전쟁을 경솔하게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런 스캔들로 오히려 오퓸을 더 유명하게 만들어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이슈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계 최초로 패션쇼에서 흑인 모델을 세운 디자이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는 무엇을 디자인하든 어떠한 행동을 하든 모든 것이 남들과 다른 괴짜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패션계의 진화이자 혁명이 된 것입니다. 이 예술을 사랑한 천재 디자이너를 프랑스인들은 존경하였고 패션계에 남긴 큰 업적으로 그는 프랑스의 국가적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패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패션의 역사(이브 생 로랑) (1) | 2024.04.18 |
---|---|
패션의 역사(위베르 드 지방시) (0) | 2024.04.17 |
패션의 역사(크리스찬 디올에 대하여) (0) | 2024.04.14 |
패션의 역사(가브리엘 샤넬) (3) | 2024.04.13 |
패션의 역사(살바토레 페라가모에 대하여) (2) | 2024.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