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패션의 역사입니다. 오늘은 크리스찬 디올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크리스찬 디올은 다른 패션계의 거장들보다 경영기간이 무척 짧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동안 경영을 하였냐면 단 10년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프랑스의 패션계의 유행을 주도했으며 혁명적인 디자인 "뉴룩"
을 비롯하여 의복의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의 명언을 시작으로 글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여인의 향수는 그녀의 손글씨보다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크리스찬 디올의 생애
크리스찬 디올의 생애를 먼저 알아보자. 당시는 1900년대 초 1차 세계대전을 눈앞에 각 나라들은 불안에 잠겨있었다.
어린이들은 굶고 있으며 나쁜 짓을 하며 자기들의 생계를 걱정하는 이 시기에 프랑스 노르망디에 살고 있는 어린 소년에게는 어두운 모습이 찾아볼 수 없었다. 왜일까?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전에 애기란 샤넬이나 다른 디자이너들은 어린 시절이 불우하고 윤택한 생활을 누리지 못한 반면 크리스천 디올은 부르주아로서 행복하게 어린 시절을 누렸다. 그의 가족들은 항상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비싼 액세서리를 착용하며 자신들의 부를 자랑하였고 집 안에서는 꽃 향기와 은은한 향수 냄새가 항상 가득 맴돌았다.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디올은 1910년에는 파리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당시의 그의 꿈은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보고 경험한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그에게는 예술적 감각으로 넘쳐흘렀고 친구들과도 파리의 미술관을 찾으며 상류층의 문화를 즐겼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건축가를 적극 반대를 하였다. 외교관이 되길 바랐던 그의 부모는 정치학으로의 공부를 디올이 하길 원했고 디올이 자꾸 뜻대로 안 하자 모든 지원을 끊겠다는 말에 결국 디올은 1920년대에는 정치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디올은 정치학은 지루하고 잠 오는 시간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수업을 빼고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들은 다 찾아다니며 그들과의 애기를 즐겼으며 당연히 학교 생활은 점점 엉망이 되기 시작하였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예술에 대한 생각으로 계속된 방황을 하던 디올을 보던 어머니는 결국 남편을 설득하여 디올에게 갤러리를 열어주어 맡기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디올에게 우리 집의 가문의 이름을 쓰지 말고 다른 이름을 사용한다는 조건하에 갤러리를 열어주었고 1928년 디올은 자끄 봉장이라는 갤러리를 열게 되고 남다른 안목과 미적감각을 가진 그였기에 순식간에 유명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며 갤러리를 잘 운영해 나간다. 하지만 3년 뒤 그의 꿈이 채 날기도 전에 일이 생겼다. 바로 그의 어머니가 사망을 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심지어 여기서 얼마뒤에 그의 친형마저 사고로 죽게 되자 집안은 힘들어지기 시작하며 결국 아버지의 사업도 망하면서 집안이 주저앉고 말았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부잣집 도련님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충격이었다. 당시 디올의 나이는 20대 후반이었다.
결국 그는 1931년에는 자신이 좋아하고 소중히 하던 갤러리의 문을 닫게 되었다. 집도 그 무엇도 없이 떠돌던 시절 친구들의 집에서 전전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고 친구들도 피할 때에 한 친구가 디올에게 너는 그림을 잘 그리니 그림을 그려 팔아보라는 말에 디올은 오트 쿠튀르 숍에 드레스나 모자 일러스트를 그려서 팔기 시작하였고 돈을 벌 뿐 아니라 디올의 실력이 좋음을 보던 메르시 마담은 로버트 피제에 소개를 해주게 되며 디올은 로버트 피제의 부티크에서 1938년 보조 디자이너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의류 디자이너로의 일을 하게 된 그는 부티크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자신만의 실력을 쌓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1939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디올도 여기에 참전하라는 영장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부티크를 그만두게 되었고 2년간 전쟁터를 겪으며 점점 지쳐가던 차에 1941년 꿈에 그리던 제대를 하며 다시 파리로 컴백을 하게 되었다. 그는 곧 뤼시앵 를롱의 부티크에서 일을 맡아서 하게 되는데 함께 일하던 동료인 피에르 발맹과 지방시와 같은 부티크에서 보조 디자이너로 서로 실력을 쌓게 되며 지내는 어느 날 그의 어릴 적 친구가 숍을 방문하면서 그에게 인생의 중요한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바로 디올의 친구가 소개해준 사람이 마르셀 부 삭이었다. 그는 당시 섬유 업계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고민이 있었으니 고품질의 섬유는 많지만 이것을 가지고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 줄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 있던 차에 디올을 만난 것이었다.
디올의 본격적인 시작
이렇게 디올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이름을 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46년 파리 몽테뉴 30번가에 그의 첫 오트 쿠튀르 하우스 크리스찬 디올이 세상에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다올의 예상대로 1940년대의 파리의 패션은 1930년대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장의 여파로 인해 파리지앵들마저 딱딱하고 남성적인 옷을 입고 다녔다. 또 전쟁 중 많은 남성들이 전쟁에 참전하고 그 빈자리에 여성들이 농장과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기에 유니폼이 흔했던 시기이다.
그리고 당시에 샤넬이 여성들의 옷 유행을 화려한 게 아닌 단조롭게 입는 게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기에 디올은 고민을 하던 차에 여성들의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찾아오는데 어느 날 여성들의 일상 대화 속에 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회복되면서 단출하게 입는 게 점점 지루해 보인다는 말이 돌게 되고 이때는 샤넬도 잠정적인 은퇴를 한터라 파리 패션계는 공황상태가 되었음을 안 디올은 자신만의 컬렉션을 1947년 2월 12일 날 공개를 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게 되는데 딱딱하고 밋밋한 옷이 아닌 여성들의 아름다운 허리를 강조하는 라인과 부드럽게 떨어지는 어깨선 하며 종아리까지 오는 살랑거리는 스커트의 길이까지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디올의 옷을 보고 감탄하며 옷을 구매하기 시작한다.
샤넬이 싫어하던 여성들의 코르셋까지 착용하게 만들고 치마를 넓게 퍼지게 하여 페티코트까지 입혀서 유행을 만들었으며 당시에 일부 여성들은 여성들을 상품으로 보냐며 일부 반발이 있었지만 당시에 시대와 상황이 전쟁이 끝나고 여성들은 일터에서 벗어나 다시 가정에 충실하는 주부로서의 역할과 여성으로서의 역할이 늘어나던 때라 더욱 디올의 의상이 있기를 끌었던 것이다. 이를 사람들은 "뉴룩"이라고 부르며 당시를 즐겼으며 거기에 대해 디올은 자신만의 향수도 론칭을 하게 되는데 이름하여 미스 디올을 만들게 되었고 1950년대를 거치면서 프랑스는 디올을 시작으로 오트 쿠튀르의 황금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렇게 잘 나가는 디올이지만 그는 특이한 게 있으니 바로 미신 광이었는데 항상 쇼를 시작하기 전에 타로를 보았는데 타로 답변이 좋아야 쇼를 진행하였으며 또 매 컬력션마다 그의 고향인 "그림발"이라는 명칭의 코트를 포함시켰으며 적어도 한 명의 모델은 반드시 그가 좋아하던 백합 다발을 들고 런웨이에 서게 할 정도로 미신을 믿었다.
그렇게 쭉 인기를 끌고 갈 것 같은 디올은 갑작스럽게 죽게 되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디올은 이탈리아 몬테카티니 스파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휴양지에서 죽었는데 어느 곳에서는 식사 도중 생선 뼈가 걸렸다고 하고 다른 곳은 카드게임을 하다가 죽었다는 둥 아직까지 말이 많다.
하지만 중요한 건 디올이 죽었다는 것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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