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패션의 역사로 알아볼 위인을 같이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세계 최초로 사각형 트렁크를 만든 루이 뷔통에 대해서입니다.
루이 뷔통의 성장배경
루의 뷔통의 성장배경은 특이하였다. 어릴 적 꿈은 목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피에르 뷔통이 목공소를 운영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아버지 밑에서 나무를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되며 목수로 살기로 했으나 14세가 되던 해에는 문득 고향이 너무 작다고 느끼기 시작한 루이 뷔통은 아버지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며 파리로 가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는 다음 달 낼 세금 내기도 빠듯하다며 경제적인 이우로 거절을 하자 혼자서라도 가겠다는 이 당찬 소년은 결국 1835년 자동차는 물론이고 기차도 대중화되지 않은 시기에 막무가내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곧 엄청나게 먼 거리라는 것을 체감하여 갈등을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며 파리로 가는 길에 식당이나 마구간을 만나면 그곳에서 일을 하며 여비를 벌었고 1년 만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탄도 잠시 일단 먹고살아야 하기에 가방가게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을 보고 지원을 하지만 가방 만드는 일을 해본 적이 없기에 허드렛일인 손님들의 짐을 싸주는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루이 뷔통의 인생의 전환점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의 가방 가게들은 판매뿐 아니라 여행을 가는 부유층을 위해 짐을 대신 싸주는 일도 하였는데
뜻밖에도 루이 뷔통의 짐 싸기 실력이 너무나도 잘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소문이 나게 되어 파리 전역에 부유층들이 일을 맡겼으나 그곳에서도 나폴레옹 3세의 황실에까지 소문이 흘러들어 가게 되었다. 당시에 외지니 황후는 짐을 싸는 하인들에 일 처리를 불편해하였으니 당연히 루이 뷔통을 불러드렸고
루이 뷔통은 외지니 황후의 공식 패커로 임명을 받게 된다.
루이 뷔통의 전환점
루의 뷔통도 큰 전환점을 맞이 하게 되는데 시간이 흘러 33세가 되던 해에 외지니 황후는 루이의 실력이 아깝다며 후원을 해줄 테니 가게를 내보라고 권하며 가게를 차려주었고 이것이 첫 가게이자 자신의 이름을 딴 루이 뷔통이다.
당시에 교통수단이 나날이 발전을 하여 여행을 떠나는 부유층들이 많아졌고 치장하기 좋아하는 귀부인들은 많은 물품들을 담아 갔는데 당시의 트렁크는 오늘날과 달리 둥글게 말아져 있어 짐을 나르기가 불편하였다.
이것을 유심히 보던 루이는 결국 스스로 제작을 하기에 이르렀고 오늘날의 세계 최초의 사각 트렁크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제작한 사각 트렁크는 사각 트렁크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그 이유는 가죽 소재가 아닌 방수 캔버스를 사용해 비가 와도 끄떡없었으며
가방 내부에는 칸막이까지 있어서 옷을 비롯한 짐을 효율적으로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가게가 커지자 공장을 직접 설립하여 많은 사람들을 채용하여 일을 하게 되는데 이건 불과 가게를 내고
5년 만에 이뤄낸 업적이었다.
루이 뷔통의 문제점
잘 나가던 루이 뷔통도 결국 문제점이 나타나는 시기가 있었다. 어느 날 노년에 접어든 루이 뷔통은 1859년 아들 조르주 뷔통에게 사업을 물려주게 된다.
조르주 뷔통 또한 사업을 잘 꾸려가지만 이때부터 지금까지 루이 뷔통의 골칫거리인 짝퉁이 판을 치게 되는 것이었다.
짝퉁이 판을 치자 조르주 뷔통은 모조품 방지를 위해 1872년에 새로운 디자인으로 트렁크를 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줄무늬 트렁크의 탄생이었다.
이때부터 루이 뷔통의 브랜드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며 많은 구매자가 생기지만 그만큼 많은 짝퉁이 계속 나오자
고심을 하던 조르주 뷔통은 또 다른 가방을 선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1888년 세상에 선보이는 격자무늬 트렁크였다.
당연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만 당시에도 프랑스 사치스러운 문화로 고 가게 거래되던 가방들을 모조품 없자 들은 싸게 팔게 되면서 끊임없이 모조품과의 대결을 하게 되었다.
결국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자신의 아버지인 루이 뷔통의 앞 글자를 따서 제품에 브랜드의 로고로 프린팅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896년 오늘날 루이 뷔통의 상징인 모노그램의 탄생이었으며 세계 최초의 브랜드 로고이다.
조르주의 모조품 방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노그램을 상표로 등록을 하였고 결국 모조품 업자들과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며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만든다.
이제는 더욱 내실에 집중한 조르주는 다양한 방향으로 가방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대표적인 변화로는 고객이 가방을 주문 시 고객이 원하는 이니셜도 같이 새겨주었으며 고객의 요청에 따라
가방의 크기나 내구성까지 집중하게 되게 되었다.
이런 피나는 장인 정신의 결과로 루이뷔통은 더욱 유명해지게 되며 조르주 뷔통이 은퇴하고 그의 아들인
가스통 루이가 고객의 편리성과 디자인까지 생각을 하며 만든 것이 1932년 첫 번째 소프트 백 노에를 론칭하게 된다.
루이 뷔통의 내리막길 그 후 변화
루이 뷔통도 내리막길은 막을 수 었었을까? 백 논에의 인기로 그렇게 더욱 변화하고 발전을 해나가지만 점점 세대가 바꿜수록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디자인으로 혹평을 받으며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결국 이를 눈여겨보던 베르나르 그저께도였다. 그는 많은 회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루의 뷔통까지 인수하자 거대 럭셔리 기업 LVMH를 창립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당시에 대부분의 유럽 명품 브랜드들은 전문적인 마케팅 없이 순수하게 가업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고 프랑스 출신이지만
미국식 경영 방식을 공부한 베르나르 아르토는 그들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그 틈을 파고들어 사업을 인수했다. 당연히 프랑스인들은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비난은 곧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왜일까?
다 망해가던 브랜드가 그의 경영 수완으로 엄청난 가치의 세계적 브랜드로 혁신적인 변화를 만들어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루이뷔통은 전문적인 비즈니스 체계 속에서 전 세게 130여 개의 매장을 소유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전속 디자이너가 없는 문제도 베르나르 아르토가 해결하면서 더 다양한 디자인이 나오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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